10일 오후 경기 파주시 월롱면 ‘IㆍL플러스’ 공장. 3월 말 정식으로 문을 여는 남성 수제화 전문 제조업체다. 300㎡ 남짓한 공장 안에서는 김태훈(41) 한영준(38) 박승재(40) 안윤승(42)씨 등 근로자 4명이 새로운 명품 수제화 ‘아지오(Agio)’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지오란 이탈리아말로 ‘편안한, 안락한’이라는 뜻이다. 정식 오픈을 앞두고 막바지 기술 점검 중이 한창이었지만 기계 소리만 요란할 뿐 기술자들의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청각 장애인들이었다.
1980, 90년대 구두 공장은 청각장애인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직장 중 하나였다. 이들은 단지 말하고 듣는 것만 불편할 뿐 뭔가를 꾸준히 만드는 작업은 일반인들보다 더욱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해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외환위기로 구두 업계가 요동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국내 굴지의 구두업체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고, 일부 공장은 중국 등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떠났다. 나머지 공장들도 기계화를 통해 인건비를 절감했다. 정상인들도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서 청각장애인들은 구조조정 0순위였다.
쫓겨난 이들은 대부분 건축 현장 잡부 등 일용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94년부터 3년여 간 대형 구두업체에서 근무했다가 실직한 뒤 IㆍL에 합류한 한영준씨는 “당시 구두공장에서 월 40만원 안팎의 박봉을 받으면서 일했다”면서 “그래도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란 점 때문에 자부심도 많았는데 결국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이 2억여원을 투입해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명품 수제화 공장을 건립했다. 이들에게 수제화 제조 기술을 전수하고 있는 38년 경력의 안중문씨는 “기술 습득력이 정상인들보다 조금 더딘 것은 사실이지만 일에 대한 의욕이 대단한데다 기술이 일정 궤도에 올라서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좋은 수제화가 생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IㆍL플러스가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판매망 확보. 아무리 잘 만들어진 제품이라도 판매를 해야 수익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특히 중저가 구두들이 주목 받는 요즘, 켤레 당 20만원에 달하는 아지오의 판로 개척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가격을 낮춰 시장과 타협하지 않고 고품질 전략으로 정면 대응키로 했다. 시중 제품보다 훨씬 좋은 가죽을 사용하고, 평생 무료 A/S서비스까지 하기로 한 것. 또 집중력이 뛰어난 청각장애인들이 품질 전 공정을 모두 손으로 꼼꼼히 만들었다는 상품성을 강조할 예정이다. 일단 관공서부터 시작해 점차 판매로를 넓히는 한편, 올해 안에 아지오 전용 매장 1호점을 열 계획이다.
자치단체 차원의 지원도 절실하다. 장애인 복지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제조 시설은 마련했지만 창업 초기 운영비가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안에 청각장애인 기술자를 16명까지 확충할 계획이어서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많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지만 다시 구두를 잡고, 안정된 직장을 얻게 된 이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벅차기만 하다. 유석영 복지관장은 “업체 명인 IㆍL플러스는 ‘사랑합니다(I love you)’와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면서 “단지 돈을 버는 장소가 아니라 불안한 생활을 영위해 왔던 청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